“기후위기, 전쟁, 빈곤... 뉴스에서 매일 보는데도 왜 이토록 실감이 안 날까?”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졌지만, 그 순간 내가 가장 걱정한 건 내일 아침 뭘 먹을지였다.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이기적인 감정일 수도 있지만, 이런 감정은 나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멀리 있는 문제는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는 생각, 아마 한 번쯤 해봤을 거다.
이런 인식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 있다. 바로 '심리적 거리 효과(Psychological Distance Effect)'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가깝다’고 느껴질수록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동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반대로 심리적으로 ‘멀다’고 느껴지면, 그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마치 게임 속 이야기처럼 느껴지곤 한다.
심리적 거리란 무엇일까?
심리적 거리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얼마나 가까이 느끼는가’를 결정짓는, 아주 복합적인 감각이다.
여기엔 네 가지 대표적인 차원이 있다:
시간적 거리(언제 일어나는가), 공간적 거리(어디서 일어나는가), 사회적 거리(누구의 일인가), 확실성의 거리(정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예를 들어, “기후위기로 인해 50년 후 해수면이 1m 상승할 것이다”라는 말은, 시기적으로 너무 멀게 느껴진다.
또 “남극의 빙하가 녹고 있다”는 말은 지리적으로 멀다.
“가난한 이웃들이 오늘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소식은 사회적 거리에서 나와 거리가 멀 수 있다.
이렇게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그것을 점점 더 ‘추상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구축수준 이론(Construal Level Theory)이라고 부른다.
즉, 거리가 멀수록 우리는 그 대상을 단순화하고, 개념화하며, 감정적으로 덜 반응한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나와 전혀 무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멀리 있는 문제에 무감각해질까?
우리 뇌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 왔다.
예를 들어, 원시 시대에는 “언젠가 사자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보다는 “지금 눈앞에 사자가 있다”는 위협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본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한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청구서, 눈앞의 마감, 오늘 저녁 식사 준비 같은 것들이 우리 뇌에 더 큰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반면, 먼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일, 또는 나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문제는 뒷전이 된다.
그래서 기후위기나 사회적 불평등, 전쟁 같은 거대한 문제에 대한 뉴스는 ‘중요한 것 같긴 한데, 내 일은 아닌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건 무관심이라기보단, 뇌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반복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무의 문제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심리적 거리 효과
이 개념은 거창한 사회 문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도 심리적 거리 효과는 계속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운동은 중요하니까 다음 달부터는 꼭 시작해야지”라는 다짐.
이건 시간적 거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 뇌가 덜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오늘부터 하자’는 생각은 너무 가까워서 피하고 싶은 감정이 생기지만, ‘다음 달’은 일단 보류해도 괜찮은 것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예로는 뉴스에서 본 재난 사고보다, 친구가 겪은 작은 실수에 더 감정이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건 사회적 거리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본 적 있는 사람의 일은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 속 수백 명이 죽는 장면보다, 애완동물이 다쳤다는 SNS 글에 더 슬퍼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공감 능력을 발휘하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때로는 이 감각이 왜곡될 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심리적 거리 효과는 어떤 문제를 만들까?
이 효과가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잘못 작동하거나, 우리의 사회적 책임감을 무디게 만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공감 결핍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숫자나 그래프로만 볼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 마비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말보다, “김씨 가족이 홍수로 인해 집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더 가슴 아픈 이유다.
또 하나는 정책 무관심이다.
환경보호, 사회복지, 인권 문제 등은 대부분 ‘멀게 느껴지는 이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긴 한데 나랑은 관계없는 일 같아”라고 느끼고, 행동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행동 미루기도 대표적인 결과다.
건강검진, 저축, 공부, 관계 회복 같은 일들은 모두 미래를 위한 투자다.
하지만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 일은 자꾸 뒤로 미뤄지게 된다.
심리적 거리, 알고 보면 줄일 수 있다
이제 중요한 질문 하나.
심리적 거리, 과연 줄일 수 있을까?
다행히도, 방법은 있다.
첫째는 이야기의 힘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나 구체적인 사례를 들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거리를 좁히게 된다.
예를 들어 “수백만 명의 난민”보다는 “아이 둘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는다.
둘째는 시각화와 비교다.
멀게 느껴지는 문제도 시각 자료나 주변 사례로 보여주면 갑자기 가까워진다.
“북극의 빙하가 1m 녹았다”보다, “서울 남산만한 빙하가 사라졌다”는 표현이 훨씬 직관적이다.
셋째는 자기와의 연결 고리 만들기다.
기후위기가 남 일이 아닌 이유, 복지 정책이 내 삶에도 영향을 주는 이유를 알려주면, 심리적 거리도 줄어든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에서 ‘나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문제’로 전환되는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마치며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에 대해 ‘가깝게’ 혹은 ‘멀게’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그건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이 심리적 거리를 이해하고, 줄이려는 노력을 조금만 더 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따뜻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멀리 있는 문제를 내 일처럼 느끼는 것,
그 작은 인식의 변화가 진짜 변화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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