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의 함정들 - 인지편향

공정 세계 가설 - 세상이 정의롭다고 믿고 싶은 마음

by SerendInfo 2025. 4. 7.

누군가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는 뉴스를 볼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아마 본인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을 거야.’ 그 판단은 순간적이고, 논리적인 분석보다는 감정과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정말 모든 결과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서 비롯되는 걸까. 여기에는 인간의 심리 깊숙이 자리 잡은 하나의 인지적 편향, ‘공정 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 작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공정 세계 가설이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황동의 저울 한쪽에는 무거운 벽돌이 다른쪽에는 깃털이 놓였지만 저울은 평형 상태이다

 

공정 세계 가설이란 무엇인가

공정 세계 가설은 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가 1960년대에 제안한 개념으로, 사람들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는 이론이다. 즉,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을 당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일을 당한다’는 믿음이다. 이 가설의 근간에는 세상이 예측 가능하고 질서 정연하다는 신념이 있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인간은 불확실성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러너는 실험을 통해 이 개념을 설명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한 여성이 전기 충격을 받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는데, 그 여성은 실제로는 배우였고 충격도 가짜였다. 흥미로운 점은, 참가자들이 여성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녀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일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단지 고통받는 사람을 본 것만으로도 그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정 세계 가설이 사람들에게 주는 심리적 안정감

사실 이런 믿음은 인간에게 일정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세상이 공정하다는 믿음은 우리가 이 세계를 통제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어떤 노력을 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고, 잘못된 행동은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삶을 예측 가능하게 만든다. 반대로 말하자면, 세상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면 우리는 불안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공정 세계 가설은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불안정한 사회일수록 이 믿음은 더욱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실업, 질병, 범죄 등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빈번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더욱 간절히 세상이 정의롭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 생존 전략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공정 세계 가설의 사례들

이 편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범죄 피해자를 향해 “그 시간에 왜 그곳에 있었느냐”는 식의 말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자가 겪은 고통보다 ‘그럴 만한 이유’ 찾기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조심했더라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성공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은 엄청 노력했으니 당연히 성공했을 거야”라고 말한다. 물론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성공에는 개인의 능력 외에도 사회적 자본, 운, 구조적 환경 등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복잡한 요인을 무시한 채 오직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공정 세계 가설의 전형적인 작용이다.

또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가난한 건 결국 본인이 열심히 안 살았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 구조적 문제는 보이지 않게 되고,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된다. 그 결과, 구조적인 변화나 제도 개선보다는, ‘열심히 안 한 사람’만 탓하게 되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공정 세계 가설을 넘어, 더 현실적인 시각 갖기

공정 세계 가설은 일면 안정감과 질서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경우 현실을 왜곡하고 타인을 비난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세상은 반드시 정의롭지 않다. 선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얻은 이들이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인식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착하게 살면 결국 잘 될 거야’라는 말은 어릴 적부터 들어온 익숙한 위로이고,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선의가 보상받는 것은 아니며, 성실함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인 장벽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현실을 마주하면 불공정함에 분노가 들기도 하고, 무력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눈을 감고 외면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불편하지만, 더 깊은 공감과 사회적 통찰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인지 편향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타인의 불행 앞에서 섣불리 판단하거나, 모든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몫으로만 돌리는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더불어, 사회 전체가 더 공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구조적 문제들을 점검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정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정하지 않은 현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공정 세계 가설은 우리가 무의식 중에 기대고 있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기대를 내려놓고, 불완전한 세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더 나은 방향을 함께 고민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정’을 향한 첫걸음일지 모른다.